어른의 이상적 모델을 노래하다 [서정민갑의 수요 뮤직 / 민중의 소리] 2020. 11. 23   정미조



정미조 신보 [바람같은 날을 살다가]

 

정미조 복귀 후 세 번째 음반이다. 2016년 [37년]을 내며 돌아온 정미조는 2017년 [젊은 날의 영혼]을 내놓은데 이어, 올해 11월 9일엔 세 번째 음반 [바람같은 날을 살다가]를 발표했다. 이번 음반은 [37년]의 프로듀서를 맡았던 손성제가 다시 프로듀서를 맡고 곡을 써 손성제의 존재와 부재가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여실히 드러냈다. 소속사 대표이자 작가인 이주엽이 쓴 시적인 노랫말도 정미조의 음악 세계를 함께 구축했다.

정미조의 음악 세계는 팝이다. 슬로우 템포의 곡들이 다수를 이루는 음반 [바람같은 날을 살다가]에서 템포가 빠른 곡은 ‘너의 웃음’와 ‘시시한 이야기’ 정도. 정미조는 느리게 노래하고, 연주는 목소리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모든 곡에 맛깔스러운 연주의 순간이 있지만, 연주는 항상 목소리의 뒤에서 목소리를 보좌하는데 치중한다.

음반의 주인공은 철저히 정미조의 목소리이다. 정미조의 목소리 역시 한순간도 압도하지 않는다. 정미조는 자신의 보컬을 뽐내기 위해 노래하지 않고, 감정에 사로잡힌 채 노래하지 않는다. 노년의 목소리가 지닌 한계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정미조의 노래는 성찰하듯 발화하고 관조하듯 노래한다. 정미조의 창법과 연주는 노랫말이 지향하는 세계와 정확하게 조응하며 그의 음악 세계를 완성한다.

그 세계는 ‘어른의 세계’이다. 살만큼 살았다고 저절로 주어진 어른의 세계가 아니다. 정미조의 [바람같은 날을 살다가]는 공공시설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나이 어린 이들을 하대하는 어른의 세계와는 한참 멀다. 이 음반의 서사를 끌고 가는 목소리는 “동화 같은 삶은 없어/잠시 웃고 잠시 우는 아주 작은 얘기들이 세상의 전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차오르던 꿈들 빛나던 나의 날개/어느 샌가 사라”졌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힘들다면 쉬어가기/이 순간을 사랑하기/나를 한 번 안아주기 또 없을 날들”이라는 이야기가 자연스럽다.

살만큼 살았기 때문에, 나이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 어른인 것이 아니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지금 자기 곁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 알기 때문에 어른이다.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인정하기 때문에 어른이다. 자신으로 수 십 년을 살아오면서 안팎의 세계와 끝없이 쟁투한 사람은 온 몸에 생채기를 새기며 겨우 깨달음을 하나씩 얻어 어른이 되었다. 때로는 타협했고, 때로는 몸부림쳤을 것이다. 어떤 것은 붙잡았으나 어떤 것은 끝내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을 것이다. 정미조가 “지금껏 움켜쥔 주먹 안에/부끄러운 욕심 하나 그 하나만 남았네“라고 노래하는 이유다.

그러나 이렇게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어른이라는 증거이다. “오늘 우리 헤어져도 괜찮을 것 같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저 바람같이 자유로운 날을 살다/어느 날 문득 바람같이 떠나가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주엽이 가사를 쓰고 손성제, 이규호, 전진희가 곡을 붙이고 정미조가 노래한 음반의 주인공은 흔하게 존재하는 현실의 장년이나 노년이 아니다. 고투하면서도 계속 성장한 어른, 혹은 나이 들었을 때 되고 싶거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른의 이상적인 모델에 더 가깝다.

예술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일만 하지는 않는다.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아직 도달하지 못했지만 가야할 길을 잊지 않도록 반짝이는 일이 예술의 역할 가운데 하나이다. “이 길 끝엔 아무 것 없어요/앞서 가도 별 볼 일 없어요/뒤에 가도 아무 일 없는 걸요”라는 노랫말이나, “나 행복했네/살아 아름다웠네 그 모든 순간들/내 삶에 감사를”이라는 노랫말이 의미를 갖는 이유이다.

음반에는 이처럼 지나가버린 날들을 향한 그리움과 후회와 아쉬움을 고백하는 노래들이 다수이다. “아름다운 첫 발자국 되어/내게로 와줘”라는 바람을 표현하거나 “나는 또 살고 싶겠지”라는 기쁨을 노래하는 곡도 있고, “오 한번 더”라고 간절함을 토로하는 곡도 있지만, 음반의 주된 정조는 회고적 성찰에 가깝다.

삶이 끝나는 날까지 이 삶을 다 불태우고 가겠다는 파토스 넘치는 자아는 정미조와 이주엽, 손성제의 조합에서 찾을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이 들었다고 인생을 돌아보고 통찰하며 마무리 할 준비를 하지 않고, 오늘만 살겠다는 열정으로 불타는 미루야마 겐지 같은 어른의 노래가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모든 예술이 모든 태도를 다 보여줄 수는 없다. 정미조의 음반은 정미조의 태도와 어법으로 유일무이한 의미를 이룬다. 자신다운 태도로 깊은 노랫말은 노랫말에 조응하는 멜로디와 태도를 현시하는 사운드를 통해 아름다움을 구현한다.

음반에는 대체로 미니멀하게 연주하는 편곡 스타일이 지배적인데, 첫 곡 ‘습관처럼’이 관악기를 사용하는 순간처럼 곡의 품격을 판가름하는 대목들이 허다하다. ‘석별’과 ‘다음 생엔 그냥 스쳐 가기만 해요’, ‘한 번 더’의 잔잔한 건반 연주나 ‘눈사람’의 정갈한 클래식 기타 연주처럼 귀를 적시는 소리의 맛을 만나는 즐거움은 이 음반을 듣는 다른 이유이다. ‘너의 웃음’의 펑키한 사운드와 신스 팝을 시도한 ‘시시한 이야기’는 햇살처럼 번진다. 그리고 ‘바람같은 날을 살다가’에서 피아노와 현악기와 보컬이 어우러지는 순간이나 ‘다음 생엔 그냥 스쳐 가기만 해요’에서 정미조의 목소리가 처음 흐르는 순간에선 번번이 충만해진다.

‘삶에 감사를’에서 트럼펫 연주가 흘러나올 때, ‘너는 날아’에서 장중한 연주로 도입부가 시작될 때 처럼 이 음반에는 고즈넉한 소리의 조합과 발산으로 매혹되는 순간들이 즐비하다. 묵직한 목소리로 시간의 순환을 노래하며 음반을 마무리하는 정미조는, 다시 음악을 시작한 후 과거의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을 음악을 내놓고 있다. 삶도 길고 음악도 길다. 끝은 아무도 모른다.   [서정민갑의 수요뮤직 / 민중의 소리]